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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生 과 死의 境界에서
풍경외 /사찰외 기타

고불총림 방장 수산당 지종 대종사 다비식

by wolf 2012. 3. 13.

 

 

 

 

 

 

 

 

 

 

1. 수산당 지종 대종사 임종게

 

 九十年生是空花 (구십년 삶이 이 허공꽃과 같은지라, ) 

今日離幻歸本家 (오늘 환을 여의고 본가로 돌아가노라. ) 

落花翩翩鵲鳴中 (꽃잎 떨어져 흩날리며 까치 소리하는 가운데, )

呵呵一翻空劫外 (하하 웃고 한번 뒤집으니 공겁 밖이로다.)

 

2. 남기신 소탈한 말씀.

" 중노릇 잘하려면 조석예불 꼭 참석하고 하루 세 끼 공양 빠지지 않으면 절반은 이룬 것이요,
일상 속에서 망상 부리지 않고 화두 챙기면 성공하는 것이다.
중벼슬 닭벼슬 만도 못한 것이니 자리에 연연치 말고 묶이지 말라"

대종사님의 법명은 지종(知宗)이요 법호는 수산(壽山)이십니다.

 

3. 신문기사

1922년 3월 2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지산리 명지산(明智山)마을에서 부친 유병학 공과 모친 마씨 상품행님의 삼남으로 태어나셨으니, 본관은 강릉유씨(江陵劉氏)이고 함자는 평열(平烈)입니다.

대종사님은 14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모시고, 탈상하자마자 그 이듬해 17세 때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또다시 삼년상을 모시게 되었으며, 이에 인생무상을 깊이 느껴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19세에 백양사에 입산하여 1941년 20세에 만암대종사님을 계사로 법안스님의 위패상좌로서 사미계를 수지하고, 그 다음해에 비구계를 수지하셨습니다.

1944년에 백양사 강원 과정을 마치고 나자, 만암대종사께서 백양사 산내암자인 청량원에 머물게 하고 말씀하시길 “모두 다 필요없는 것이다. 네가 죽었다 작정하고 ‘이뭣고’나 참구하거라” 함에, 이로부터 일구월심 참구정진에 몰입하게 되었으며 청량원에 머무시는 1년여 동안 매일 만암대종사님의 지도점검을 받고 공부의 기틀을 잡으셨다고 합니다. 1945년 동안거를 백양사 운문암, 1946년 하안거를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그 해 동안거부터 1948년 동안거까지 인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나주 다보사에서 용맹정진하셨습니다. 이 때 상기되어 머리가 푹 익어버릴 지경이 되자 인곡스님께서 화두를 놓아버리라고 하셨으나, 화두를 놓을래야 놓아지지 않는지라 그대로 화두일념에 맡겨두고 지내는 중에 확연히 불조의 도리가 밝아짐에 “수중일월(袖中日月)이요 장악건곤(掌握乾坤)이라” 고 토로하셨습니다. 1949년부터는 목포 정혜원에서 만암스님을 조실로 서옹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반선반작(半禪半作)의 안거정진을 하였으며, 1953년 가을에 만암스님꼐 입실(入室)하여 다음과 같은 전법게와 함께 수산이라는 법호를 받으셨습니다.

< 高兮無見頂 四海不曾間 念盡言窮處 巍然一壽山 >

 

대종사님은 이후로 “출가사문은 이(理)뿐만 아니라 사(事)에도 밝아야 하며, 선사(先師)스님들의 얼과 원력이 담긴 가람수호에도 공력을 기울여야 하고, 대중교화 포교에도 진력하여야만 불조의 은혜를 갚고 시은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라는 만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완도 신흥사, 영광 불갑사 포교당, 부안 개암사, 태백 흥복사 등 어려운 사찰 주지소임을 맡아 15여년 이상 가람수호와 포교에 진력하셨고, 백양사 본사가 어려워질 때마다 1966년, 69년, 73년 세 번에 걸쳐 주지소임을 맡아 근검절약과 공심(公心)으로서 해결해 놓고 미련 없이 걸망지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1975년 이후 목포 반야사에 머물며 청년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영광 불갑사에 주석하며 쇠락한 가람을 중수하셨습니다.

1986년부터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89년부터는 종립학교인 광주 정광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하여 인재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이셨고, 1998년 불갑사 선원을 개원하여 수행도량의 면모를 갖추고 2001년 이후 10여년의 복원불사를 지도하여 오늘날 백제불교초전성지 불갑사를 대대적으로 복원 중창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광 법성포에 마라난타존자의 불교초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백제불교최초도래지 기념성역불사에도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2004년부터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주석하며 후학들을 제접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지칭하여 ‘물코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암, 서옹 두 어른스님 들의 말씀을 받드느라고 어려운 절, 어려운 곳만 끄달려 다니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내는데 평생을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대종사는 항상 공심(公心)과 신심(信心)을 강조하셨고, 반선반농(半禪半農)의 가풍을 평소 그대로 실천해 오셨습니다.

대종사님의 하루 일과는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서 간단한 요가 후에 예불을 모시고 아침공양시까지 좌선을 하셨으며, 낮에는 사중 살림을 세세히 살피시고 내방객을 제접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에 홀로 치시는 단엄(端嚴)한 죽비소리는 제일 먼저 도량을 일깨우고 청량한 기운을 불어 넣었습니다. 대종사는 “중노릇 잘할려면 조석예불 꼭 참석하고 하루 세끼 공양 빠지지 않으면 절반은 이룬 것이요, 일상속에서 망상부리지 않고 화두 챙기면 성공하는 것이다. 중벼슬 닭벼슬 만도 못한 것이니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묶이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시고, 그 말씀처럼 평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소탈 담백하게 지내시며 욕심 없는 것으로서 평상행(平常行)을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항상 차를 즐기셨으며 작설차와 전차(錢茶) 제다에도 조예가 깊었으니, 찻잎을 딸 때나 차를 만들 때에 그리고 마실 때에도 망념이 없어야 하고 수미일관(首尾一貫)하여야만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선차(禪茶)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고, 몸소 평생동안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대종사의 선차는 학명대종사와 만암대종사로 이어지는 선차와 반선반농의 가풍을 올곧게 이어온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불복장점안의식에도 밝으셔서 수많은 사찰의 불보살상과 존상들의 복장점안의식을 봉행해 오셨습니다. 복장점안의식에 임할 때에는 지심귀명의 예경심을 오롯이 하여 진중하고 청정하게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2011년 7월 3일 부처님 점안식에 증명으로 참석하셔서, 굉장히 무더운 날씨로 인해 시자들이 잠깐만 참석하시고 쉬시라고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존상 점안 증명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며 구십 노구를 돌보지 않고 1시간 반 이상을 증명으로 좌정해 계셨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날 심하게 탈진 증세를 보이셨으며, 그 때부터 자주 병세가 나타났고, 점차 쇠진(衰盡)해 지셨습니다.

수산 대종사님께서는 2012년 3월 7일 오전 8시 44분 전남 영광 불갑사에서 <九十年生是空花 今日離幻歸本家 落花翩翩鵲鳴中 呵呵一翻空劫外 : 구십년 삶이 이 허공꽃과 같은지라, 오늘 환을 여의고 본가로 돌아가노라. 꽃잎 떨어져 흩날리며 까치 소리하는 가운데, 하하 웃고 한번 뒤집으니 공겁 밖이로다.>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법납 73세, 세납 91세로 세연을 다하고 엄연(嚴然)히 천화(遷化)하셨습니다.

 

 

“화두 속에 살다가 화두 속에서 죽어야지”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종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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